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케임브리지 대학교 (문단 편집) === 대학의 성장과 그 영향 === || {{{#!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6px" [[파일:Trinity College.jpg|width=100%]]}}}|| || '''▲ 트리니티 컬리지''' || 100여년 뒤 [[잉글랜드]] [[성공회]] 내에서 왕당파와 의회파([[청교도]]) 간 분열이 일어날 때 케임브리지는 그 분열의 중심이었다. 특히 엠마누엘 컬리지(Emmanuel College), 세인트 캐서린스 컬리지(St Catharine's College), 시드니 서섹스 컬리지, 크라이스트 컬리지(Christ's College)는 청교도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들 컬리지 졸업생들 및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2만여 명의 청교도들이 당시 잉글랜드의 식민지였던 [[매사추세츠]]로 이주했으며, 이들의 영향으로 [[보스턴]]의 위성도시 중 하나의 이름이 [[케임브리지]]로 정해진다. 이 케임브리지에 1636년 세워진 [[대영제국|영국 식민지]] 최초의 대학이 바로 '''[[하버드 대학교]]'''이며, [[존 하버드]]를 비롯한 하버드 대학교 창립자들 대부분이 엠마누엘 컬리지 출신이었기 때문에 하버드의 초기 조직은 엠마누엘을 많이 참고했다.[* 그래서 현재도 엠마누엘 컬리지는 하버드와의 [[교환학생]] 등 교류 프로그램이 잘 구비돼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도 1861년 보스턴에 세워졌다가 1916년에 이 케임브리지로 이전했다. 한편 [[잉글랜드 내전]]기 [[청교도]]들의 의회파를 이끌고 승리하여 1649~1658년 [[잉글랜드 연방]]을 세우고 [[호국경]]으로 군림한 [[올리버 크롬웰]] 또한 시드니 서섹스 컬리지 출신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가장 유서 깊은 전공인 수학 전공은 이 영국사 격동의 시기에 태동했다. 케임브리지의 첫 [[수학자]]는 1557년 [[등호]] 기호 '='를 처음 도입한 로버트 레코드(Robert Recorde)[*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이지만 케임브리지에서 [[MD]]를 취득했다.]지만, [[존 월리스]], 아이작 배로우, '''[[아이작 뉴턴]]'''이 활동하던 17세기부터 케임브리지, 나아가 영국이 수학계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이 거인들의 후광은 역효과도 있었는데, 바로 영국 수학계가 유럽 대륙에서 일어나던 수학의 눈부신 발전을 외면하게 만든 것. 대신 학부 교육에서는 천천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536년부터 천천히 중세 [[자유학예]] 교육에서 벗어나던 케임브리지에 1725년 즈음부터 우등생들을 가리기 위한 수학, 철학 구두시험이 도입되었다. 이후 문제가 시험지에 인쇄되기 시작했고, 1790년 즈음부터 현재처럼 답안지에 문제를 풀어 제출하는 시험 체계가 완성되니 이것이 바로 '''전세계 모든 대학 시험의 조상격'''인 수학 트라이포스(Mathematical Tripos; 현재는 수학 전공생들이 학년 말인 6월에 치는 시험 혹은 수학 전공 학부과정 자체를 가르키는 말)의 시초다. 당시에는 1월에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대학본부의 세네트 하우스(Senate House)에서 시험이 치러졌는데, 아궁이가 없었기 때문에 잉크가 얼기도(...) 했다고. 1820년대에는 [[찰스 배비지]] 등의 노력으로 드디어 대륙 수학계의 연구 결과들이 시험과 교육과정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 때 즈음부터 케임브리지에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맥스웰]](트라이포스 2등), [[제1대 켈빈 남작 윌리엄 톰슨|켈빈 경]](2등), 스토크스(1등)[* 트라이포스 최고득점자는 스미스 상 수상자를 가리기 위한 추가시험에 초대되었는데, 이는 현 [[학석사 연계과정]]의 조상격이다. 스미스 수상자 수상자로는 [[앨런 튜링]], [[프레드 호일]] 등이 있다. 켈빈은 [[켈빈-스토크스 정리]]를 처음 발견한 뒤 이 시험 문제로 출제하기도 했다.(...)], 레일리(1등; 이상 응용수학자), 실베스터(2등), 케일리(1등; 이상 순수수학자), 피어슨(3등; 통계학자) 등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수학 전공만의 졸업 시험 역할을 하는 현대의 수학 트라이포스와 달리, 당시에는 모든 케임브리지 학부생들이 수학 트라이포스를 응시해야 졸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케인스]], [[버트런드 러셀|러셀]] 등 타 분야의 거장 중에도 이 시험을 치른 이들이 많았다. 20세기 초반 훔볼트식 교육 모델[*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를 비롯한 [[독일]] 대학에서 개발된 고등교육 모델로, 연구에 중점을 둔다. 19세기 중후반부터 원래 [[파리 대학교]]식 모델을 따르던 [[프랑스]] 대학, 그리고 그 다음 [[영국]]과 [[미국]] 대학으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존스 홉킨스 대학교]] 문서 참고.]의 도입에 이르러서는 [[앨런 튜링]]이나 [[G. H. 하디]] 및 그의 제자 [[스리니바사 라마누잔]] 등을 배출하여 [[프랑스]], [[독일]] 순수수학의 위상을 넘볼 정도로 발전했다. 이 시대의 유명한 수학자나 과학자를 검색하면 태반이 케임브리지 대학교, 특히 트리니티 컬리지 출신일 정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